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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와 건이/이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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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해드림출판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69회 작성일 19-12-0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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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와 건이

 이양하



경이, 건이는, 지난 봄 내 집 앞으로 이사 온 이래 새로 생긴 어린 두 친구다. 경이는 다섯 살, 건이는 세 살, 경이는 아버지 닮아 귀엽고, 건이는 어머니 닮아 귀엽다. 얼굴이 더 귀여운 것은 아래 건이일까? 그러나, 경이는 이마 바로 위에, 이 세상에 아무도 가지지 못한 귀엽고 귀여운 가마를 가졌다.

이 가마 때문은 아니겠지만, 내게는 경이가 더 사랑스럽다. 내 친구, 즉 이 두 형제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나와는 또 아주 의견을 달리하여, 단연코 아우 되는 건이를 사랑한다. 어떤 때는 곁에 있는 사람이 딱하도록 편벽되게 건이를 사랑한다. 나는 일찍이 내 친구가 기쁨을 가지고 경이를 안아주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언제든지 경이는 미지수(未知數)요, 대중할 수 없는 곤란한 애라는 것이다.

하기는, 내 친구가 경이에게 겸연함을 느끼는 데는 이 밖에도 이유(理由)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다섯 살 났다는 애가 아직 말 하나를 변변히 하지 못한다. 어떤 말은 건이 편이 도리어 더 똑똑하게 한다. 무슨 의견이 있어 제 딴에 웅변을 토하느라고 한창 야단을 할 때는 꼭 중국말 한가지요, 또 중국말 한가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뿐인가, 경이는 또 이 동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불량소년(不良少年)이다. 경이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나면, 이 추운 겨울에도 도무지 집에 붙어 있지를 않는다. 어느 새 뛰쳐나와서는 이웃집을 쏘다닌다. 어떤 집에 가서는 밥을 내라 해서 먹고, 어떤 집에 가서는 남의 자명종(自鳴鐘)을 낱낱이 해부(解剖)해 놓고, 또 어떤 집에 가서는 남의 색시의 분갑, 크림병을 둘러엎어 놓고 부숴 놓곤 한다.

바로 뒤에 있는 내 집이 이 악소년(惡少年)의 습격에서 자유로울 리가 없다. 일요일 같은 때 집안에 들어앉아 있노라면, 이놈이 헬레벌떡거리며 내 집 문밖에 와서는, 문을 덜렁거리며,

“나 드가여. 나 드가여. 문 열어여.”

하고 야단을 한다.

“이놈이 또 왔구나. 이놈, 어떤 놈이고?”

하고 나는 고함을 벼락처럼 지르며 방문을 열고 마루에 쓱 나선다. 경이는 태연(泰然)하다. 여전히 문고리를 쥐고 덜그럭거리며,

“나요, 나요. 조고만 드가여.”

한다. 나는 부득이하여 문을 열어 준다.

“응, 경이던가. 어떻게 왔노?”

“나 드가여. 드가여. 조고만 드가여.”

“그럼, 참말로 조금만 들어올 텐가? 많이 안 들어오지?”

이러는 동안에 경이는 어느새 마루에 올라서 쏜살같이 내방으로 들어간다.

“아, 뜨거.”

이것이 방 안에 들어서서의 처음 인사다. 그리고는, 스토브에 달려들어 부젓가락을 덜그럭거리며 문을 열었다 닫았다. 윗뚜껑을 들었다 놓았다, 스토브의 모든 비밀을 샅샅이 캐낸다. 그리고 스토브가 끝나면 다음엔 테이블로 달려든다. 테이블에는 나 보기에도 참말로 많은 물건이 놓여 있다.

“이거 뭐요?”

“그거 시계다. 어비다.”

“이거 뭐요?”

“그건 잉크병, 그것도 어비다.”

“어비? 이건 뭐요?”

“그건 면도(面刀), 그건 정말 어비다. ‘꼬’ 하고 피난다.”

나는 이런 것을 하나하나 빼앗아 경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옮겨 놓는다. 그리고 펜, 연필, 칼, 가위, 찻종, 재떨이, 인제부터 경이 손아귀에 들 모든 것을 치워 놓는다. 나중에는 신통하지 않은 책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면, 경이는 이번에는 서랍을 열어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것을 꺼내 쥐고 “이거 뭐요?”, 저것을 꺼내 쥐고 “이거 뭐요?”다. 나는 또 어름어름 서랍을 잠가 놓을 수밖에.

“자, 경이, 글이나 읽어 보지. 경이, 글 잘 읽지, 왜.”

경이, 어떤 때는 주인(主人)에게 예의를 다하여 “랠랠랠랠” 한참 동안이나 글을 곧잘 읽어 보인다. 그러나 나의 이런 책략에는 경이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때는 테이블을 포기하고 바로 내게로 달려들어, 내 포켓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손수건이 나오고, 열쇠가 나오고, 도장이 나오고.

그런데, 이 양복이란 옷엔 알다시피 포켓이 좀 많은가! 조끼와 저고리만 하여도 적어도 열 개는 넘을 게다. 이리하여, 경이의 “이거 뭐요?”는 한 없이 계속 되는 것이다.

확실히, 이상한 애라면 이상한 애다. 그러나, 어쩌면 경이의 마음을 쉬 알 것도 같다. 나는, 경이가 혼자 두 손을 호주머니에 잡아넣고 길가에 나서서는, 두리번두리번 사면(四面)을 휘둘러보고 있는 것을 본다. 산에서 동네를 갓 찾아 내려와 두리번거리고 있는 어린 들짐승, 또는 표박(漂迫)의 영원(永遠)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유랑자(流浪者)의 모습이다. 이런 때는, 여러분이 혹 지나다가, “경이.” 하고 불러 봐도, 경이 시선의 초점이 여러분 얼굴 위에 맺어지지 아니하고 자꾸자꾸 먼 데로만 달리려는 것을 발견하리라. 아, 저놈의 하늘이 이상하다. 저놈의 산도 이상하다. 조놈의 집들도 이상하지 않나. 아, 조놈의 집의 문이 열려 있다. 어디 들어가 보자, 무엇이 있나. 야, 고놈의 시계 별스럽다. 어디 한번 비틀어 보자. 고놈의 분갑 아롱아롱 이상하구나. 어디 요놈도 한번……. 경이 눈앞에는 모든 것이 곧 한 경이(驚異)요 신비(神秘)다. 그러면, 이 모든 경이와 신비를 어떻게 탐색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느냐.

경이의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경이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을 게다. 경이, 하루는 어딘가 나갔다 엉엉 울며 돌아왔다. 누구한테 뺨을 얻어맞았는지, 두 볼에는 손가락 자리가 서너 개 또렷이 그려져 있다. 냉정(冷靜)한 내 친구도, 이 너무도 잔인스런 짓에는 화를 냈다. 그 손가락의 주인공이 알고 싶었다.

“어떤 놈한테 그렇게 얻어맞고 왔냐?”

“그럼, 가 봐.”

경이가 앞장서고 아버지가 뒤를 따랐다. 그러나 문 밖을 나서니 길가에 자전거가 놓여 있다. 경이의 설움은 금세 어디로 갔는지, 두 눈에는 눈물이 아직 그렁그렁한 채 자전거에 달려들어 매만지려 든다.

“이놈, 어떤 놈이 때리더냐? 어서 가 보자.”

“응, 가 봐.”

경이, 또 앞장을 선다. 한 모퉁이 돌아가니, 닭이 있고 돼지가 있다. 경이는 그 앞에 또 발을 붙인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부지, 이거 봐요.”

하며 아버지를 유혹하려 든다. 아버지는 어이가 없어,

“어서 가 봐, 이놈아.”

한다. 그러나 경이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닭, 돼지만이 아니다. 손수레가 오고, 개가 달려가고, 이웃집 아이들이 문 앞에 나와 섰고, 경이는 인제 완전히 설움을 잊어버리고, 설움과 함께 그의 원수마저 잊어버렸다.

“에이 못난 자식, 어서 집으로 가자.”

아버지는 한편 몹시 귀엽기도 하였다.

경이는 어린 시인(詩人)이다. 이르는 곳마다 기쁨을 발견한다. 자라면 훌륭한 소설가(小說家)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큰 발명가(發明家)가 되리라.

경이는 무엇보다도 건이와 함께 내 귀여운 친구요, 없어서는 아니 될 소중한 친구다. 내가 외로울 때나 갑갑하고 무료할 때, 길을 하나 건너 경이, 건이를 찾으면, 나는 거기 언제든지 나를 백 퍼센트 환영하는 두 친구를 발견하는 것이다.

“경이, 건이 있나?”

하고 문을 두드리면, 경이, 건이는 와당탕퉁탕 마루를 울리며 문으로 달려 나온다. 그리고

“드와여, 드와여.”

“드와여, 드와여.”

하고 문을 열고는, 하나는 오른쪽 소매를 잡아 이끌고, 하나는 왼쪽 소매를 잡아 이끈다. 눈이 뜨거워지는 순간이다. 참말로 관대한 주인들이다. 나는 일찍이 이들의 내방(來訪)을 이렇게 환영하여 본 일이 없는데, 이들은 나의 내방을 참으로 기뻐해 준다.

나를 이끌어다 아버지 방에다 앉혀 놓으면, 경이, 건이의 기세는 갑자기 높아진다. “야이, 야이.”, “야이, 야이.”하고 책을 던진다. 벽을 친다, 책상 위에 올라섰다 내리뛴다, …….

“야이, 이자식, 권투다이, 덤벼라!”

경이가 두 주먹을 그러쥐고 건이에게 달려들면, 건이도 지지 않고 조그만 주먹을 꼭 그러쥐고,

“야이, 권투, 야이, 권투!”

하며 달려든다. 물론, 아버지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다.

“이놈들, 저 방으로 가거라.”

“앙가, 앙가.”

“앙가.” 

“아이, 귀찮아. 여보, 뭘 하오? 애들 좀 데려 가오.”

“아부지, 조고만, 아부지, 조고만.”

하고 뇐다. 그러나, 어머님께서는 다른 술책을 쓰신다.

“이얘, 경아, 깡 주마. 이리 오너라.”

깡은 이 두 애에게만 통용되는, 사탕이라는 말이다. 경이는

“나 깡 싫어. 아부지, 나 조고만 있다 가.”

하고 또 탄원이다. 그러나, 이점 건이는 아주 공리주의자(功利主義者)다. 두말없이 깡을 받으러 안방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깡을 가지고는 다시 돌아오기를 잊지 아니한다. 하기는, 어떡하면 경이가 더 큰 공리주의자가 될지도 모른다. 왜 그러냐 하면, 건이, 깡을 가져오면, 경이는 반드시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고, 또 분배하지 아니하고 다 한데 놓고 나눠 먹게 되면, 경이, 조금도 밑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놈들, 가지 않으려면 글이나 읽어 봐라.”

우리는 교환 조건을 제출한다. 경이, 건이는 물론 이 조건을 거부하지 아니한다.

“으어 으어 으어.”

“랠 랠 랠.”

‘으어 으어’는 아버지 신문 읽으시는 흉내요, ‘랠랠’은 큰형 영어 읽는 흉내다.

“그러면 이번은 사장(社長) 해 봐야지.”

사장이라는 것은, 가난한 내 친구가, 제발 이 애들의 장래만은 좀 나아졌으면 하는 심사(心思)에서 창안해 낸, 이 애들의 재롱의 하나다. 먼저 경이가 일어서서 뒷짐을 지고 배를 내밀며 “이놈.”하고 호령한다. 그러면, 건이도 덩달아 일어서서 같이 뒷짐을 지고 배를 한층 더 내밀며 “이놈.”하고 호령한다. 그러면, 우리는 “아이, 무서.”, “아이, 무서.”하며 저두평신(低頭平信)하는 것이 임무다. 그러면 그럴수록 경이, 건이의 배는 불러 가고, “이놈.” 소리는 높아 간다.

경이, 건이의 귀여운 재롱은 이것뿐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든지 이러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 돌아오려고 일어서면-이때는 물론 또 “조고만.”하면서 경이가 한 소매를 붙들고, 건이가 또 한 소매를 붙든다. 눈이 한 번 다시 뜨거워지는 순간이다. - 경이, 건이는 으레 문까지 따라 나와 ‘안녕’을 한다. “안녕, 또 와요.”, “안녕, 또 와요.”하고. 그리고는 이건 또 대체 어느 나라 인사인지-페르시아 나라 인사인지 터키 나라 인사인지-한 손으로 코를 붙잡고 꾸뻑한다. 이런 때는 나도 물론 코를 잡고 ‘안녕’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이 코 쥐고 ‘안녕’하는, 출처를 알지 못할 인사는, 이 밖에도 내가 아침에 일터까지 친구와 동행하게 되는 날이면 받게 된다. 항상 받는 인사이지만, 받고 나면 몹시 유쾌해진다. 어떤 날은 이 인사 때문에 종일 유쾌하게 지내게 되는 수도 있다.  

해드림 이승훈 출판과 문학 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수필집[가족별곡](2012) [외삼촌의 편지] [국어사전에 있는 예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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