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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께 드리는 관/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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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해드림출판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74회 작성일 19-11-2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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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께 드리는 관(冠)

김동환


가난한 이 나라의 초대 대통령 어른께 이 관(冠)을 드리나이다.

이 冠은 뜻있는 冠이외다. 다리 아래 헌옷에 헌 구두 신고 거지 모양으로 웅크리고 앉아서 밤낮 꿈꾸고 있던 지난날의 많은 젊은 사내들이 쓰고 지내던 바로 그 冠이 이 冠이로소이다. 거지의 꿈 그는 왕이 될 꿈이었으리까? 장가들 꿈이었으리까? 부자나 귀인될 꿈이었으리까? 아니외다, 아니외다, 모두 다 아니외다. 나팔 불고 북 치는 날이 올 제 맨 앞잡이에 서서 춤추고 노래 부를 그런 꿈이었사외다. 기 들고 만세 부를 꿈이었사외다. 피 흘릴 제 맨 첫 방울을 自己 심장에서 내뿜자는 그런 꿈이었사외다. 가난하매 입은 옷은 누덕이요 쓴 갓은 때묻은 털벙거지었으나 그 마음 속은 놓고 깨끗하고 향그러웠습니다. 그 가슴 속의 뜻은 저와 제 처자와 부모까지 모두 내버리고 오직 동포의 자유와 행복을 회복하는 일에만 주소(晝宵)로 일념을 달리던 터이었던 것이외다.

이 청년은 한 사람이었으리까? 아니외다, 백인지 천인지 혹은 몇 십 몇 백만이었었지요. 또 서울 거리에만 있었으리까? 아니외다, 굴뚝 서고 초가집 놓인 모든 시골과 흰옷 입은 유랑민이 떠돌던 해내해외(海內海外) 어디에든지 끊임없이 가득하였사외다. 아마 감옥과 묘지에도 그네의 그림자는 차 넘쳤을 것으로 생각되나이다.

이제 그렇게도 안타깝게 기다리고 바라던 청년의 꿈이 이뤄질 날 와서 민족도 나라도 自由롭게 풀려 놓이고 그래서 처음으로 민주국이 이 땅 위에 서고 또 처음으로 당신께서 최고 집정의 자리에 올라섰으매 기쁜 마음을 이길 길이 없어 지난 시절에 썼던 우리들의 모자를 벗어 바치는 바로소이다. 금관보다 월계관보다 또는 모든 찬란한 보석과 금은으로 장식한 어떤 冠보다도 나은 冠일 것이로소이다. 당신께서는 이 초라한 冠이나마 그 속에 맺힌 무한한 피눈물과 한숨과 정성을 경건하게 받아서 무궁무진한 당신의 심혈(心血)로써 기능(技能)으로서 양식(良識)으로서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大統領보다도 더 값가는 공과 성의로 이 청년들에게 보답함이 있어야 할 바로소이다. 이 冠은 값으로 따질 수 없고 무게와 빛을 비할 길 없이 소중한 만백성이 정성껏 드리는 冠이오니 망국시대(亡國時代)의 설움을 표상(表象)하는 이 冠을 기쁘게 받아쓰시고 그 뜻을 한순간이라도 잊어주지 마시길 바라나이다.



가난한 이 나라 初代 大統領 어른께 또 이런 冠 하나를 더 바쳐드리나이다.

먼저 冠은 당신이 위(位)에 오르는 날에 쓰시고 이번 冠은 당신이 세상을 떠나실 때 써주시압소서. 이 冠은 벼 조각, 무명 조각으로 혹은 세모지게 혹은 네모지게 골무만치 적은 헝겊 조각을 수백 수천 개를 주워서 만든 감투와 같은 冠이로소이다.

아마 들으신 줄 알거니와 한강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느라면 남한산성으로 갈라져 오르는 하얀 모래섬이 있는데 여기를 M島라 부르더이다. 이 부근에 사람 손으로 모래를 퍼 담아 올려쌓아 만든 진시왕릉 같은 큰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 속에 묻힌 이는 몇 백 년 전 일인지요. 이 나라의 영의정으로 있던 분으로서 어떻게도 애국자였든지, 그 치하(治下)의 백성들은 이 나라 역사 위에 가장 자랑스러운 행복의 세월을 보냈다 해요. 그렇게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선정(善政)하던 그분도 그만 연로하여서 조정을 물러나와 이 마을로 와서 밭 갈고 나무 심으면서 여생을 지내다가 돌아가셨는데 백성들이 하도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장사 날 이 고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시체를 상여에 옮겨 모시고 십리도 더 되게 긴 줄바를 느려 어깨마다 메어 이 벌판에 모셔온 뒤 그 얼굴에 차마 흙을 덮기 아까워 열흘을 그저 멀거니 망곡(望哭)만 하다가 나중엔 할 수 없이 백성들이 오리도 더되는 먼 강변에 나가 일부러 거기서 하얗고 정한 모새를, 여인들은 치마폭에 어른들은 삼태기에 아이들은 한 움큼씩 손에 담아 갖다가 거기에 부어 마침내 그 한 줌 한 삼태기의 모래로서 쌓아올리고 올려 나중엔 큰 산 같은 높은 뫼를 만들고 무덤을 써서 봉분(封墳)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이 고을 백성들이 집집마다 헝겊 한 조각씩을 내어 그것으로 조각감투 같은 冠을 만들어 시신에 씌워 모셔보내었다 합니다. 만인의 정성으로 된 이 冠은 역시 금은으로 만든 아무런 冠보다도 더 높고 거룩한 冠이었을 것이로소이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드리는 冠도 이 모양으로 천인(千人)의 헝겊 조각 만호(萬戶)의 헝겊 조각을 주워 모아서 거기에 바늘과 실을 통하여 만든 冠이로소이다. 당신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쓰시고 가시되 어찌하여 가난한 이 백성이 이렇듯 지성을 기울이는가를 영원히 잊지 말아줍소서. 님은 첫 冠을 쓰시고 등극하셨다가 둘째 冠 쓰시고 이 세상 가시옵소서. 쓰고 계실 동안은 이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하늘 아래 저를 뚜렷이 나타내고 살게 해주소서. 마치 천길 지층(地層) 즉 물이 땅 밑에서 묻혔다가 지표(地表)에 솟아올라 활개 치며 노래 부르며 동해바다 서해바다로 맘대로 흘러내리듯이 조선 사람은 모두 제 천분(天分)을 내뿜으며 살게 해주소서.

님에게 맡겨드리는 우리나라는 땅도 좁고 백성 수도 적고, 그러나 그를 탄식치 않습니다. 아무도 삼천리(三千里)를 삼만리(三萬里)로, 삼천만(三千萬)을 삼억만(三億萬)으로 만들고 가시라곤 첫 조건으로 삼지를 않습니다. 다만 햇빛 못 보는 백성 하나라도 있을까봐, 다만 소리 한 번 못 쳐보는 백성 하나라도 있을까봐…….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파인 김동환 시인은 1901년 함북 경성군에서 태어나 남한 문단에서 활약하다가 1950년 7월에 납북되었다.

파인은 시 외에도 1925년부터 40년까지 약 60여 편의 수필을 발표했고, ‘대통령께 드리는 관’은 1950년에 숭문사에서 발간한 수필집 『꽃 피는 한반도』에 수록된 작품이다.
 

해드림 이승훈 출판과 문학 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수필집[가족별곡](2012) [외삼촌의 편지] [국어사전에 있는 예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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