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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조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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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해드림출판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22회 작성일 19-12-0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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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
       조병설
 

 

 

 

 

아들이 태어난 지 1년이 되어가던 봄, 나는 서울의 동북쪽에 있는 사관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교정과 언덕 위 숙소 주변엔 유난히 꽃이 많았다. 나는 자전거 앞쪽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 아기를 태우고 꽃이 핀 벌판을 달렸다. 개나리꽃, 목련, 라일락, 벚꽃, 교정 곳곳의 꽃길을 지나며 나는 아이에게 말을 가르쳤다. 아들이 엄마라는 말 다음에 첫 번째로 발음을 한 건 이라는 말이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는 해 봄, 엄마 따라 대학병원을 오르내리는 길목에도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무리 가르쳐 줘도 그 꽃을 다른 꽃과 구별할 줄 몰랐다. 더는 말이 늘지도 않았다. ‘자폐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들은 혼자 길을 갈 수가 없었다. 늘 아내가 아들의 그림자가 되었다. 아들을 고치려고 병원과 특수학교를 전전했고 나중엔 종교에 매달렸다.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꼽추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문둥병도 낫게 했다는 구세주는 이 세상에 없을까. 수 없이 꽃이 피고 지는 세월 동안 아들의 병을 고쳐 줄 이를 기다렸으나 구세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들 나이 스물세 살이 되는 해 가을, 구세주 소식이 들렸다. 불치병 환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신체조직을 새로 만들어줌으로써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척수가 문제인 사람은 척수를 바꿔주고 신장이 문제인 사람은 신장을 만들어 바꿔 줄 수 있게 되었단다. 드디어 구세주가 이 땅에 재림한 것인가. 미국이나 영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머나먼 동방의 조그마한 이 나라에 정녕 그이가 왔단 말인가. , 대한민국 만세, 구세주 만세다.
아픈 사람들은 그 구세주를 향해 달려갔다. 척추 장애인, 당뇨병 환자, 백혈병 환자도 달려가 치료 대기명부에 등록했다. 아내에게도 빨리 가보라고 했다. 병원을 다녀온 아내가 말했다. 자폐증은 원인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조직을 바꿔야 할지 모른다고 시기상조란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기다리면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내와 나는 구세주에게 박수를 보냈다.
 

초겨울로 접어들며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그 구세주가 가짜라는 소문이었다. 그는 그 소문 때문에 힘이 빠져 몸져누웠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건 그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헛소문이요, 구세주를 골고다의 언덕으로 내몰던 로마의 군사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어야 한다고 하며 그가 일하던 곳으로 몰려갔다. 백혈병으로 투병하는 여인의 동생, 철봉에서 떨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아들을 둔 아비, 오랜 기간 소아 당뇨병으로 인슐린 주사를 맞는 아이를 둔 엄마도 몰려갔다. 그들은 그의 사무실에 무궁화 한 송이씩을 놓고 나와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진달래꽃을 뿌려 꽃길을 만들며 말했다.
구세주여, 진달래꽃을 지르밟고 돌아오세요.”
 

석가가 오랜 고행 끝에 해탈하는 순간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고, 부처가 된 석가는 그 꽃을 밟고 중생구제의 길을 출발했다고 한다. 이 땅에 돌연 나타난 그도, 저 꽃길을 밟고 다시 나타나 불치병 환자들에게 구제의 손을 뻗을 것인가.
그러나 구세주는 그 꽃길로 나타나지 않았다. 아픈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전에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의 언덕으로 향하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건 사람의 몫이 아니고, 오직 신의 몫인가. 사람이 신의 권한을 침범한 것인가.
스물세 살 아들은 여전히 혼자 길을 갈 줄 모른다. 아들이 가는 곳엔 언제나 아내가 붙어 있고, 아내가 가는 길마다 아들이 함께 간다. 언제까지 그렇게 같이 갈 수 있을까. 사람은 종국엔 혼자 가는 게 아니던가. 꽃가마를 타고 와 아들을 만난 아내는 꽃상여도 함께 타고 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얼었던 산야엔 꽃이 피겠지. 거연히 꽃길을 걸어 봄빛 같은 구세주가 오고, 아들은 혼자 길을 갈 수 있겠지.
 

해드림 이승훈 출판과 문학 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수필집[가족별곡](2012) [외삼촌의 편지] [국어사전에 있는 예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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