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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녀와 함께 즐긴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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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래여 댓글 2건 조회 582회 작성일 22-11-26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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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함께 즐긴 오후

     박래여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일방통행이기 어렵다. 욕심 부리지 않고 살면 도움의 손길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라 본다. 도움을 받으면 또 다른 누군가를 돕게 된다. 농사꾼으로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주고받는 것에 자연스러워졌다. 농사지을 때는 힘들어도 농산물 퍼낼 때는 쉽다. 돈 들여 사서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깝다는 생각조차 없다. 단감 한 봉지라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가을이었다.

 

 근 4년 동안 시부모님의 재가 간병을 맡았던 그녀는 참 인정스럽다. 단감 못난이도 참 많이 팔아줬다. 고마워서 함께 겨울 빛 구경을 갔다. 점심 한 끼 대접하기로 했다. 그녀는 세 근이 넘는다는 무공해고춧가루를 들고 왔다. 간병일 하면서 틈틈이 농사를 짓는다. 부지런한 그녀, 천상 촌부인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하다.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노인 간병일이 좋단다. 수시로 농사지은 것들을 퍼내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주는 것을 행복으로 안다.


 이웃 고장은 한우 쇠고기로 유명하다. 주말에는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경제가 어렵다고 노래하나 음식점에 가면 경제는 흥청망청 이다. 길을 오가는 차량은 고급차 일색이고 고급오토바이 족은 굉음을 내며 질주를 즐긴다. 얼마 전 우연히 발견한 맛집이 있다. 골목집 뼈다귀 해장국은 맛있다. 이런 맛이면 손님이 차고 넘쳐야 하는데 왜 손님이 없을까. 골목 안쪽 허름한 옛날집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녀는 뼈다귀 해장국이 진짜 맛있단다.


 점심을 먹고 가까운 강변 산책로를 걸었다. 억새꽃이 하얗게 피어난 자리, 갈대가 일렁이는 자리, 잘 닦아놓은 길섶에는 쑥이 파릇하다. 날씨가 얼마나 따뜻한지.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어려서 불렀던 노래를 자연스럽게 흥얼거린다. 농부는 지팡이부터 챙겨준다. 그녀가 혀를 찬다. ‘난 여왕이잖우.’ 웃으면서 지팡이를 짚고 걷는다. 주말이라 강변 공원은 사람들로 붐빈다. 한쪽에는 아마추어 야구 경기가 진행 중이고, 한쪽에는 관광차에서 내린 사람들로 시끄럽다.


 마음 맞는 벗과 산책을 하면 좋은 점은 가슴 속 이야기를 사심 없이 쏟아낼 수 있다는 거다. 상대가 받아주고 이해해주면 저절로 속을 풀어놓는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 속에 두 어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돈 받고 하는 간병이지만 진심을 다했다. 버석거리는 시어른과 며느리 틈새를 메워 주었다. 내 끈이었고 소식통이었다. 살림에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진가. 예를 들어 배추나 무가 필요하다면 시아버님께서 아이가, 그런 거 살 필요 없다. 묵다 안하는 거 말라 사하셨다. 그녀는 내게 전화를 했다. 나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필요한 재료를 사서 농부 편에 보내거나 주말에 비치해 뒀다.


 그녀는 내게 참 고생했다고 말한다.

 나도 그녀에게 참 고생했다고, 고마웠다고 말한다.

 

 그녀는 우리 집 텃밭 구경을 했다. 아직도 된서리를 안 맞은 호박잎이 신기하단다. 어린 호박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호박순을 자른다. 싹싹 씻어 들깻국 끓이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단다. 호박잎 된장국은 알아도 들깻국 끓이는 것은 몰랐다.

몽땅 따 가라. 난 질려서 싫어. 국 끓이는 것도 질려서 싫고. 오늘 밤에라도 된서리 내리면 못 쓰잖아. 파릇한 것은 다 따가서 이웃에 나누어줘. 할머니들 호박잎 좋아하잖아.”

방울토마토가 빨갛게 익어있는 거 봐. 자기 집은 봄이네. 우리 동네는 호박잎도 방울토마토도 몽땅 말라버렸는데. 저 배추와 무시 좀 봐. 상추도 이들이들 하네. 배추 안 남아? 난 올해 배추가 속이 안 차서 걱정이야.”

배추? 필요하면 줄게. 영감이 올해는 김장 조금만 하라고 벌써부터 잔소리야. 잘 됐네. 여남 포기 남는데 가져갈래?”


 그렇게 남은 배추도 해결했다. ‘우리가 머 무 샀나. 너거가 많이 묵제.’ 시어머님 말씀이 귀에 울린다. 올부터 시댁 김장도 할 필요 없다. 앞으로 일꾼 쓸 일도 없다. 모자라면 새 김치 담가 먹으면 된다. 문제는 반찬 만들기가 자꾸 귀찮아진다는 거다. 끼니마다 새 반찬을 원하는 농부지만 마음 내키면 찌지고 볶는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지 않기로 했다. 노인이 되면 소식을 한다. 군것질거리를 입에 달고 사셨던 노인을 생각한다. ‘당신 알아서 챙겨 드셔. 마누라 믿지 마. 밥하기, 반찬 만들기 싫을 때면 당신이 챙겨 잡수.’ 선수를 친다.


 나는 그녀에게 가을 표고버섯 말린 것은 한 봉지 줬다. 김장할 때 육수 빼라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오후를 넘겼다. 덜 익은 늙은 호박도 세 덩이 따 갔다. 난 필요 없으니 음식장사 하는 집이거나 이웃에 나누어주라고 했다. 무공해 먹을거리니까 못 생겨도 맛은 좋고 저장성도 뛰어나다. 그녀는 자기가 받은 선물이 배 보다 배꼽이 크단다. 나는 내가 받은 선물이 배보다 배꼽이 큰데. 텃밭 농사는 조금만 부지런해도 자급자족을 할 수 있다. 겨울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문제긴 하지만 따뜻한 그녀가 이웃에 있어 행복한 하루였다.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마음을 열고 이웃과 소통하고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일상을 조곤조곤 풀어 놓은 내용에서 삶의 진솔한 단면을 훔쳐보며 나까지 흐뭇한 기분입니다. 삶이란 그렇게 어우렁 더우렁 다양한 인연과 연을 맺고 이어가는 여정이 아닐까요. 일상의 고백같고 일기 같은 내용에 한 표 던지며 슬쩍 곁다리 껴봅니다.

박래여님의 댓글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선생님, 고맙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제 삶의 자리는 늘 고요합니다.
날마다 쓰는 글이라 새로울 것도 없지만 그냥 일상을 쓰면서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좋습니다.
겨울 빛이 처연한 숲입니다.
건강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