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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혁명>을 목격한 한국인 근로자들 > 자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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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이슬람 혁명>을 목격한 한국인 근로자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춘봉 댓글 2건 조회 571회 작성일 22-11-23 13:06

본문

동영상 https://url.kr/doa162

 

BBC 뉴스코리아 2022107일자 기사 이슬람 혁명 전 이란 여성의 삶은 어땠나?’ 를 읽고

평소, ‘정치가 종교를 수단 화 하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역사 인식의 경지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78년 이란 아바단에 있으면서 이슬람 혁명을 목격했기 때문에, <역사의 굴곡과 변전>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 군인이던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1921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1925년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국명을 바꾸고 사법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국립은행 창설, 징병제 제정, 이란 최초의 현대식 테헤란 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남녀 차별 풍조를 없애려고 여성 해방을 국회에서 결의한 다음 1936히잡착용금지령을 내렸습니다.

1941926, 부왕의 양위로 즉위한 팔레비 2세는 영국이 소유한 석유회사를 국유화하였고, 세속주의, 근대화 정책을 밀고 나가, 1963년부터 백색혁명을 시작하였으며 토지개혁, 여성참정권 부여 등 근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1974년에는 테헤란에서 아시안 게임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왕권 안정을 위한 국방비 증액과 인플레이션, 생필품 부족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 이슬람 전통을 중시하는 원리주의 무슬림 - 민족주의 세력의 반발을 불러 이슬람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1978년 정치 지도자 겸 종교지도자 '호메니'가 주도한 이슬람혁명으로 팔레비2세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 중반부터 팔레비 왕조는 경제정책 실패로 재정 수입원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면서 현대적 개혁을 향한 왕조의 의지는 친 서구적인 것으로 비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보수 세력 시아파가 반미 구호를 외치면서 팔레비 왕정과 정면충돌, 이란 정국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시위 군중 함성이 도시마다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정세가 불안하니까, 아바단 정유증설공사 주체였던 일본 미쓰비시중공업관계자들이 자국 근로자들을 귀국시키면서 한국인 근로자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이란 정세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중동 근로자 송출을 장려하던 대한민국 정부는 이란의 불안한 정세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H실업과 미쓰비시중공업200여 명의 근로자 취업 계약을 맺고 출국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습니다.

신생 K종합건설이 그 점을 노리고 H실업을 합병 인수했습니다.

H실업 소속이었던 근로자들은 1978227일 이란 아바단에 도착을 했고, K종합건설 관리직원 - 부장, 과장, 주임, 기사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329일에는 약 55개 이란 도시에서 시위가 있었고, 이슬람 사원에 모인 군중들에게 군대가 무차별 발포를 했다고 합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이란에 도착한 한국인 근로자들은 배정 받은 숙소에 도착한 다음에야 -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 근로자들이 사용하던 숙소는 컨테이너였습니다.

그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이 널려 있었고, 무장한 이란 군인들이 경계 근무를 하는 가운데 철조망 울타리 속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통근 버스로 아바단 정유공장으로 이동하는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H실업 전속 하도급업자였던 나는 37세였고, 육십 중반이었던 현장 소장은 H실업과 미쓰비시 중공업 용역계약을 성사시킨 실무자였으며,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작업에 임하고 며칠이 지난 다음부터, 이란인 버스 기사가 미쓰비시중공업이 일본인 근로자들을 귀국시키고, 한국인을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이란 정세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근로자들은 계약서에 명시된 8시간만 일을 하고, 귀국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 때야 소장이 나에게, - ‘미쓰비시 중공업은 항공료 편도만 부담하고, 귀국 항공 요금은 K종합건설이 부담하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근로자들에게 전달하라고 말했습니다.

소장 말을 전해들은 근로자들은 회사가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면서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공포심은 전염성을 띠기 마련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수영을 해서 가까운 쿠웨이트로 도망가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말수가 적은 소장은 불안을 잠재울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K종합건설에서 온 부장과 과장은 해외 근무 경력이 없었고, 근로자들과 한 번도 어울린 적이 없는 답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인간 만사 새옹지마문구가 생각났습니다.

달아난 말이 준마를 끌고 오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나는, 거두절미 하고 소장에게 말했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이시히 과장에게 위험수당을 달라고 하세요."

계약상에는 그와 같은 조항이 없다면서 소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정세가 불안한 상황에서, 위험수당 요구는 당연하다고 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공정을 앞당길 때마다 성과금도 달라고 하세요."

미쓰비시중공업관계자들은 한국 근로자들 동태를 살피고 있었을 것이고, 작업거부나 귀국 이야기 대신, 공정을 앞당겨주기까지 하겠다는 말에 - 그들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시히과장으로부터 위험수당과 성과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나는 동료 근로자들 설득에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 명단을 소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약간의 돈을 준 다음 - 식당에서 내가 말할 때, 여기저기서 "옳소!" 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켜달라고 부탁을 한 바 있었고, 마침내 근로자들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1978817, ‘에스파한에서, 시위대를 해산 시키려고 군대를 투입했다가 수 백 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식당에 있는 TV로 보았습니다.

불안한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로자들은 돈벌이가 좋아졌기 때문에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불안을 해소하고, 동료들 사기를 높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소장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소풍을 가자고 야단입니다."

소장은 뜬금없는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란은 법으로 공창을 허용한 나라입니다. 그곳을 구경하게 해주세요."

한동안 망설이던 소장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까짓 것, 못할 것도 없지. 갔다 오시오."

"50불 씩 주고, 식사와 음료수도 푸짐하게 준비하라고 지시하세요."

소장 직권으로, 그 정도의 선심은 얼마든지 쓸 수가 있었습니다.

"함께 가시는 겁니다!"

"늙은 내가 어떻게 거길 갑니까?"

K종합건설 관리직원들은 소장의 지시가 못마땅하다는 표정들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다녀와서는 박장대소하다가 내가 나타나면 시치미를 떼면서 딴전을 피우곤 했습니다.

소풍 가던 날, 두어 시간 버스를 타고 가면서 모두들 희희낙락 즐거워했습니다. 일등공신이었던 나에게 음료수를 권하는 동료도 있었습니다.

<여죄수 교도소>는 서대문 형무소처럼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허허벌판 주차장에는 픽업을 비롯하여, 낡은 승용차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습니다.

방금 도착한 픽업에서 내린 젊은이들이 - 환호성을 지르면서 정문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여죄수 교도소>는 오전 9시부터 오후5시까지 손님을 받고, 군인들이 문을 봉쇄한다고 이란 버스기사가 말해주었습니다.

정문을 통과하니까 도로 양옆으로 다방처럼 생긴 건물을 비롯하여 식당, 약국, 슈퍼, 옷가게, 이발소가 있었고, 거리는 사내들로 활기가 넘쳤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다방처럼 생긴 곳으로 혼자 들어갔습니다.

현관 벽에, 서너 명 여자 사진과 신상을 알 수 있는 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카운터는 홀 중앙에 있었고, 서너 개의 방과 그 옆에 반 쯤 열린 화장실에는 좌변기와 줄 달린 수도꼭지가 보였습니다.

방 맞은편 기다란 소파에는 사내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빈자리에 앉으니까, 나와 눈이 마주친 어떤 사내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면서 웃기까지 했습니다.

방 여기저기서 사내들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있으려니까 방에서 나온 여자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몸을 씻고, 카운터 옆에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습니다.

여자가 나온 방에서, 사내가 나왔습니다. 곧바로 청소하는 사람이 그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 중에서, 방금 나온 여자에게 손짓을 하면서 카운터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방에서도 여자가 먼저 나와 화장실로 갔고, 사내가 허리띠를 조이면서 나왔습니다.

단골손님이 많은 여자는 쉴 틈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구경만 하는 나에게, 차례가 되었다면서 알려주는 사내가 있었습니다.

단골손님이 없는 여자가 내 차지가 된 것 같았습니다.

카운터에 가서 화대를 지불하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뒤따라 들어 온 여자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커먼 차도르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는 침대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자들은 팁을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팁을 줄 각오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차도르를 뒤집어 쓴 여인을 보니까 기분이 상했습니다.

젖가슴도 보이지 않게 허리티를 조여 맨 여자의 벌거벗은 하반신은 욕정을 배설할 때 필요한 물건처럼 보였습니다.

나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이었습니다.

민둥산에 올라가 황홀경을 경험할 수도 있고, 세상일에 달관한 도인처럼 '허허허' 웃으면서 방을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화대를 이미 지불했기 때문에 그냥 나온다고 해서, 화를 낼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른 집에도 가보았습니다. 그곳 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트에 들어갔다가 원하는 물건이 없으면 그냥 나와도 되는 그런 형극이었습니다.

그러나 뒷골목 사정은 달랐습니다. 늙고 못생긴 여자들이 지나가는 사내들에게 호객행위를 했습니다.

사내가 싫다고 뿌리치니까, 화를 내면서 욕을 하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팔레비1세는 페르시아를 이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 ....... 

(동영상에서 계속됩니다.)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글을 읽으며 지난 역사를 비롯해 우리의 중동 진출 실상을 비롯해 공창 등 많은 것을 유추해 봤습니다. 실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을 하셨네요.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제가 이란에 있으면서 아주 특별한 일도 했습니다.
다음 회에 -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