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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웃을 뿐 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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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2건 조회 1,022회 작성일 22-09-1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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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을 뿐 답하지 않는다


“소이부답(笑而不答)” 즉 ‘웃을 뿐 답하지 않는다’에 대한 얘기이다. 어떤 경우 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걸까. 때로는 부정하고, 때로는 긍정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묵시적으로 통용되는 행동이다.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다양한 해석을 불러 일으켜 가끔 뜻하지 않은 다툼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세상사라는 게 자칫하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드물지 않게 맞닥뜨리게 마련인 상황이다. 


원래 중국의 당(唐)나라 이백(李白)이 호북성(湖北省)의 안릉(安陵)이라는 초야에 묻혀 살 때 지은 ‘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에 “소이부답”이라는 구절이 있다.


問余何事栖碧山(내게 왜 깊은 산 속에 사느냐고 묻기에)

笑而不答心自閑(빙그레 웃고 대답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롭다)

桃花流水杳然去(흐르는 물 위에 복사꽃이 아득히 떠가니)

別有天地非人間(여기가 바로 별천지인가 하노라)


달관 아니 불가(佛家)에서 얘기하는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시선(詩仙)이 깊은 산중에 은거하는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우매한 누군가가 오지에서 왜 사느냐고 여쭸으리라. 아귀다툼을 일삼고 풍진이 찌든 속세를 떠나 대자연과 동화된 즐거움을 누리던 도인이 무엇이라고 할 말이 있었을까. 그저 빙그레 웃는 것으로 답할 밖에 달리 이를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게다. 이 상황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조선(朝鮮) 개국 무렵에 왕사(王師)이었던 무학대사가 일갈했다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산속에 왜 사느냐고 묻는 뱁새’가 어이 ‘첩첩산중에 유유자적 은거하는 봉황’의 뜻을 지혜롭게 헤아릴 수 있으리오. 이런저런 정황을 살필 때 왜 산속에 사느냐는 물음에 답할 말이 궁해서가 아니었으리라. 남에게 구태여 주저리주저리 얘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입을 닫고 빙그레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는 맥락에서 “소이부답”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세월이 지나면서 진리도 변하는 게 세상이다. 우리가 매일 입에 올리는 말 또한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원래 “소이부답”은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의 산중 생활의 만족과 즐거움을 말 대신 웃음으로 표현’했던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엔 이미 알고 있다거나 자신을 드러내 쑥스러워 겸양을 나타내는 긍정적 경우의 쓰임새는 대폭 줄어들었다. 반대로 애매모호하거나, 가치가 없고 어이가 없거나, 편들기 어렵거나, 입장이 난처하거나, 모르거나와 같이 복잡한 사정이 얽히고설켜 자기주장을 선뜻 드러내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사용되는 왜곡 현상이 훨씬 많아졌다.


이따금 누군가로부터 받는 질문에 답 대신 웃음으로 답하고 따로 대꾸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 원인을 따지자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대충 그렇게 응대 하는 게 시정을 악화시키지 않고 조용히 마무리 지을 최선의 대응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우 호오(好惡)나 긍정과 부정을 명확하게 밝히는 데는 한계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지만 생각을 뚜렷이 밝히는 경우에 비해 득이 많다고 판단되어 그리 처신한다.


“소이부답”하면 어처구니없게도 석가모니인 부처와 그의 제자인 가섭(迦葉)이 떠오르곤 한다. 석가모니께서 인도 영취산의 대중 앞에서 설법을 하던 중간에 ‘깨달음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다. 모두가 그 참뜻을 헤아리지 못해 어리둥절할 때 좌중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제자가 그 뜻을 헤아렸다는 뜻을 담아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그가 바로 가섭이다. 이 미소가 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과 일맥상통하는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微笑)”이다.


어지럽고 복잡하게 뒤엉킨 사회에서 좀생이처럼 시시콜콜 말로 표현하지 않고 웬만한 일은 이심전심인 “소이부답”으로 소통하는 문화가 뿌리내린다면 훨씬 부드럽고 여유롭지 않을까. 물론 행위자의 의도에 반하는 왜곡으로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발할 개연성을 도외시 할 수 없다. 그럴지라도 믿음과 신뢰가 전제된다면 뒤로 돌아앉은 돌부처처럼 묵묵부답(黙黙不答)으로 뻗대는 상황에 견줄 때 찻잔 속의 미미한 파문에 지나지 않을 터이기에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지 싶다. 


한맥문학, 2022년 9월호, 통권 384호, 2022년 8월 25일

(2022년 6월 11일 토요일)


댓글목록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선생님 '소이부답'은  요즘 같은 현실에서는 너무 고차원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걸핏하면 드잡이하려 들고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하드보일드하다면' 소이부답'은  오해와 냉소만이 난무하지 않을까요?
그 격조를 따르지 못한다면 아예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정직할 것 같네요.
선생님 잘 계시는지요?  어느새 가을색이 완연해졌습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빌어요^^

박래여님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연꽃처럼 빙그레 웃을 일이 많아지는 노년이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