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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찾고 또 찾는 보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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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1건 조회 738회 작성일 22-09-05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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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고 또 찾는 보리암


몇 차례 다시 마주한 보리암(菩提庵)일까. 평소 시간 여유가 있거나 답답할 경우 무작정 나서는 나들이에서 물보다는 산을 선호하는 성격 때문이리라. 산의 품을 즐겨 파고들면서 산사와 자연스럽게 연을 맺었다. 이름을 올렸던 종교가 없었던 때문에 믿음과 관계없이 발길이 닿았던 사찰들이 제법 많다. 그런 인연이 맺어진 암자 중에 하나가 남해 상주의 금산(錦山 : 해발 681m) 관음봉 정상 언저리에 자리한 보리암이다. 삶터에서 가까운 까닭에 근처에 발길이 닿을 때면 의례적인 문안 인사를 여쭈듯이 찾다보니 어느덧 대여섯 차례에 이르렀나 보다. 한두 번은 우연이라고 생각해 덤덤하게 지나쳤다. 하지만 우연도 되풀이되면 필연이라고 여겨 작정하고 암자에 대한 자료를 여기저기에서 살짝 들여다봤다.


보리암은 신라(683년 : 신문왕 3)의 원효대사가 지금의 터에 초당(草堂 : 갈대나 짚, 풀 따위로 지붕을 엮은 암자를 뜻하며 초암(草庵)이라고도 한다)을 짓고 수도하던 도량이란다. 이곳을 비롯해 양양 낙산사 홍련암(강원문화재자료 36), 강화군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음 성지’*로 꼽힌다는 얘기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3대 기도처’ 중에 하나라는 귀띔이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뒤에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던 시현도량(示現道場 :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변신하여 나타나는 도량)으로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고 명명하고, 범우(梵宇 :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로 작명했다는 얘기다.


거의 천 년 가까이 보광사로 불리다가 조선태조 이성계가 젊은 시절 여기에서 백일기도하고 조선을 건국했음에 감사해 현종(1660년)이 보광사를 왕실의 원당(願堂 :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으로 원찰(願刹)이라고도 함)으로 삼고 보리암(菩提庵)으로 개액(改額 : 이름을 고친 편액을 내림)했다. 한편 일설에 의하면 가락국의 김수로왕도 여기에서 기도하고 대업을 이뤘다고도 하며, 왕의 일곱 왕자도 외숙(外叔)을 따라 출가해 보리암에서 수행하다가 가야산을 거쳐 지리산 반야봉에서 수도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했다는 얘기가 풍문으로 나돈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로 입증된 바는 없으며 전설에 불과한 것 같다.


보리암의 주요 당우(堂宇 :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와 문화재에 대한 사연이다. 먼저 ‘보리암 보광전(普光殿)’은 주 법당으로 대웅전 역할을 하며 초창(初創)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를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다. ‘보리암전 3층석탑(菩提庵前 三層石塔)’은 고려시대의 것인데, 석재(石材) 중에 일부가 가야의 김수로 왕비인 허태후가 인도에서 올 때 싣고 왔던 파사석(婆娑石)*이라는 설도 있으나 인정받지 못하는 풍설로 간주되고 있다. 이 석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절벽 위에 자리했으며 비보(裨補)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견해에 주위를 돌며 찬찬히 살펴봐도 어떤 관점의 견해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풍수 지리적으로 부족한 기운을 인공적으로 보완하는 방식으로 완전을 기하려는 비책을 ‘비보(裨補)’라고 한다. 이는 묘(墓) 자리의 지형이 좌청룡 우백호가 바람직한데, 허하거나 부족한 부분에 흙을 쌓거나 나무를 심어 모자람을 채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시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관악산(冠岳山)의 큰불 기운이 승(勝)해 크고 작은 화재나 왕자의 난이 발생한다는 지적에 따라 조정에서 취했던 다양한 비보책을 떠올릴 수 있겠다.


한편 ‘산신각’의 현판은 ‘신령각’이라고 붙어 있으며, 내부에는 호랑이 위에 앉은 산신상이 모셔져 있단다. 또한 ‘별을 보는 곳’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간성각(看星閣)’은 중무소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범종각(梵鍾閣)’은 여느 사찰처럼 종각이고, ‘극락전(極樂殿)’은 가장 큰 건물로서 수많은 원불(願佛 : 중생 제도를 본원(本願)으로 하여 나타나는 부처)이 봉안되어 있다는 견지에서 만불전(萬佛殿)이라고 호칭되기도 한다. 아울러 남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세워진 ‘해수관세음보살상(海水觀世音菩薩像)’은 보리암에서 기(氣)가 가장 센 위치에 세웠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세심히 살펴도 그 말의 의미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외에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5호인 ‘목조관음보살 좌상’이 있다. 이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으로, 관세음보살상 왼쪽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 오른쪽에는 용왕이 호위하고 있는 형국이란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인 초암(草庵)일 뿐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불자(佛子)들이 무리지어 찾아와 불공을 드림은 ‘관음 성지’라서 기도발이 잘 받는 때문일까. 게다가 불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중생들도 전국에서 몰려들어 주차장이 늘 모자라고 조붓한 경내가 저잣거리처럼 북적거림은 단순히 관광 명소로 알려진 연유일까.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범접할 수 없는 신통한 법력(法力)이 중생들을 이끄는 것 같다.


남해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 때문인지 빼어난 관광지와 명승지가 즐비한데 나는 그중에서도 보리암을 으뜸으로 꼽는다. 그런데 이 정찰(淨刹)을 찾았을 때의 느낌은 신기하게도 판박이처럼 거의 똑같다. 산꼭대기 가파른 바위절벽 난간의 아찔한 터에 자리한 암자는 바람이 달고 청아해 몽환적 분위기이다. 게다가 저 멀리 아련하게 넘실대는 평화로운 남해와 꿈꾸는 듯한 자태의 산야가 어우러진 비경을 감상할라치면 묵은 체증이 쑥 내래가고 막혔던 숨통이 뻥 뚫리는 기분을 만끽한다. 불공을 드려야 할 불자가 아니기에 암자를 찾을 때마다 얼렁뚱땅 경내를 한 바퀴 훑어본 뒤에 발아래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선경 같은 정취에 빠져들면 세속의 씨줄과 날줄로 얽힌 일상을 까마득하게 잊게 마련이다. 이 경지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심신을 추스를 수 있게 된다는 매력에 이끌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중독자처럼 반복해 찾는가 보다. 암자 주위의 한적한 바위너설을 찾아 걸터앉으면 어느 결에 무념(無念), 무상(無常), 무애(無碍), 무구(無垢), 무욕(無慾)에 이르는 환희를 맛보게 마련이다. 그런 희열을 누릴 때마다 밑지는 오그랑장사를 하지 않았다는 흡족함에 터덜터덜 걷는 하산 길의 발걸음이 무척 가볍고 흥에 겨워 뭔가를 흥얼대는 내 꼴이 이상하게 비춰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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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 성지 :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으로 이 성지에서 기도하면 ‘관세음보살의 가피력(加被力 : 부처나 보살이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주는 힘)을 잘 받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 파사석(婆娑石) : 가야의 김수로 왕후인 허태후가 인도 아유타(阿踰陀)에서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넜다는 돌이다.


남해, 유배를 품은 보물섬, 경남문인협회 사화집, 2022년 7월 1일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댓글목록

박래여님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저도 남해만 가면 보리암을 다녀오곤 했는데 이제 주차장에서 보리암까지 걸어가는 길이 너무 멀어 못 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