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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낙숫물 멍 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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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662회 작성일 22-08-1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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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숫물 멍 때리기

윤복순

 

요즘은 날씨가 오락가락한다. 장마는 끝난 것 같은데 거의 매일 한때 비가 내린다. 새벽운동을 나가면서 우산을 가지고 가야할까 어쩌야할까 어중간할 때가 있다. 오늘 아침도 나갈 때는 비가 오지 않았다. 새벽에 내렸는지 길바닥이 약간 젖어있다. 오늘 몫은 온 것 같아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벗어나 둑방길에 접어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짙은 구름이 묵직하게 내려와 있다. 그 자체로 멋져 뒤까지 돌아보며 구름 감상을 했다. 원광대 수목원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가랑비가 내린다. 이정도 쯤이야 맞아도 되지, 걸음도 빨리 하지 않았다.

수목원은 큰 나무들이 우거져 빗소리가 크다. 그러나 잎이 가려줘 옷은 별로 젖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크게 돌기로 했다. 비가 오기 때문인지 인기척이 없다. 요즘은 방학기간이고 휴가철이라서 아침마다 두 세 팀은 만나는데 오늘은 나 혼자다.

집에서 수목원까지 30분이 걸린다. 왕복 1시간은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수목원 안에서 1시간은 해찰을 하며 걷는다. 느리게 걷는 이 맛이 좋다. 나무에게, 꽃에게, 풀에게 눈을 맞추고 말을 걸고 박수를 쳐주고, 새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무궁화 꽃 속은 대체로 붉은 색인데 어느 꽃은 그 속살까지 흰색이어서 백화소심이라 이름을 부쳐주기도 했다. 수목원의 나무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많이 여유로워지고 행복하다. 느림을 즐기고 있는데 소나기가 쏟아진다.

마침 정자 곁을 지날 때여서 얼른 정자로 올라갔다. 언제쯤 겔까, 출근도 해야 하는데. 걱정을 잠시 접고 마루에 허리를 고추 세우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내가 걱정한다고 비가 금방 그칠 것도 아니잖은가.

앞엔 녹색의 큰 나무들이 있고 정자의 육각기와지붕 처마 끝에서 낙숫물이 떨어진다. 얼마 만에 보는 정경인가. 환희심이 일었다. 내가 앉은 정면으로 열 줄도 넘게 낙숫물이 줄줄 내린다. 구슬을 실에 꿰어 만든 발을 쳐 놓은 것 같다. 이런 호사가 어디 또 있을까. 요즘은 낙숫물을 볼 수가 없다. 아파트 생활이고 다른 건축물도 낙숫물 떨어지게 되어 있지 않다. 그대로 앉아 낙숫물 멍 때리기를 했다.

어릴 때 비 오는 날이면 마루에서 숙제를 하다 배를 깔고 엎어져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듣곤 했다. 초가지붕일 때는 자장가 같아서 숙제하다 말고 잠이 들었던 것 같다. 5학년 때쯤 기와지붕이었고 함석으로 차양을 만들어 물받이가 중간 중간 있었다. 그곳엔 대야나 물동이를 놓아 마당이 파지는 것을 막았다. 소나기가 퍼 붓을 때는 소가 빗속을 뛰어오는 소리 같았다.

여름엔 뒷동산에 소를 묶어 놓는다. 풀도 뜯어 먹고 나무 그늘이 시원하니까. 갑자기 소나기거 쏟아지면 밭에서 일하던 부모님이 미쳐 소를 끌어오지 못하니 소가 몸부림을 치다 줄을 끊고 비를 피해 집으로 오기도 했다. 소가 달려오는 모습이 무서웠다. 오늘, 정자에 오르는 계단의 디딤돌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꽤 우렁차다.

남미여행 때 아르헨티나에서 이과수폭포인 악마의 목구멍을 봤다 아니 들었다. 이곳이 가장 수량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그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큰데 오케스트라 공연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를 총 망라해도 뭐라 표현할 수 없고, 가슴이 쿵덕거리고 벅차올랐다. 마음이 뻥 뚫리고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오늘의 소리는 그에 어림도 없는데 마음이 후련해진다. 귀 호강이다.

낙숫물이 똑같은 굵기로 폭포처럼 떨어진다. 눈도 좋아 눈웃음을 실실 친다. 멍하니 앉아 있는 이 맛이 좋다. 촉촉하게 정서충전이 되었다. 노르웨이 여행 때 게이랑에르 피요로드 유람선에서 본 칠자매 폭포보다 더 멋지다. 마음이 한없이 선해지고 평화롭다.

약국 문을 조금 늦게 연다고 무슨 큰 일이 날까. 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도 이미 없어졌다. 주렴 같은 낙숫물을 세어보니 열 두 줄이다. 십이선녀폭포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어릴 때 낙숫물에서 물장난을 하면, 어머니는 낙숫물을 맞으면 손등에 물사마귀가 더덕더덕 난다고 못하게 하셨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낙숫물 커튼을 살짝 열어 손을 데 보려는데 마법처럼 낙숫물줄기가 가늘어지면서 비가 그쳤다. ‘칠자매폭포악마의 목구멍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멍 때리기를 접고 시간을 보니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어찌 이렇게 시간이 절묘하게도 딱 맞을까. 약국 문을 늦게 열어야 할 일도 없다. 가끔은 안 해도 될 걱정을 한다. 순간을 즐기는 것으로 충분할 텐데. 오늘, 우산을 가지고 갔다면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한없이 걸었을 것이고, 정자에 오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어떻게 낙숫물을 볼 수 있었겠는가.

실수가 가끔은 횡재를 부르기도 한다. 실수로 생각 못한 시련이나 손해가 있을 수 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자. 뭔가 더 좋은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전초전이라 생각하자. 삶에 정답은 없다. 이것만 아니라 저것도 좋다.

어머니는 왜 낙숫물을 맞으면 사마귀가 난다고 겁을 주셨을까. 옷을 다 버리고 날은 궂어 빨래는 잘 마르지 않으니까 못하게 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오랜만에 낙숫물 멍으로 심신이 충만해졌다. 오락가락 하는 장마도 삼복더위에도 끄떡없을 것 같다.

 

2022.8.5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낙숫물 소리를 상상하며 중학교 때던가 읽었던 육당 최남선 선생님의 시가 불현듯  떠 올랐습닉다. "가만이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는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저도 보름 전쯤 산에 갔다가 정상에서 소나기를 만났는데 다행히 육각정이 었어, 그 안에 들어가 한식경쯤 기다리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멍 때렸던 적이 있었지요. 비가 다 내린 것으로 착각하고 내려오는 중간에 다시 강한 소나기가 쏟아져 그칠 때까지 큰 나무 밑에서 기다렸지만 결국 옷이 몽땅 비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집에 돌아와 야단(?)을 맞았던 씁쓸한 경험이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