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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금산사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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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977회 작성일 21-07-3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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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에 다녀왔다

윤복순

 

대통령은 물론 대선주자들, 고위직들 많은 보통사람들이 금산사로 내려온다. 요즘 핫한 곳이 되었다. 그 곳이 우리 집에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며칠 전 불교계의 큰 별이 원적하셨다.

시어머니는 월주스님이 열반하신 것을 알고 계실까. 당신이 무척 좋아하고 존경하시던 분인데. 신혼초 겨울이었다. 몹시 춥고 깜깜했다. 시모는 그때까지 집에 돌아오시지 않았다. 그 당시 금산사까지 직접 가는 차는 없었다. 마중을 나갔다. 우리를 만났을 때 정신없이 걸었더니 땀이 다 난다.” 안심이 되신 듯 ~” 하셨다.

시모는 불자로 금산사에 다녔다. 가난해서 절에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어 겨우 초 한 갑을 사가지고 다녔단다. 당신의 소원은 자식들 머리를 밝혀주는 것이었고 양초에 불을 켜 환해지면 마치 애들의 머리가 밝아지는 것 같아 양초만 사가지고 다녔다. 돈을 모아 초를 샀고 초를 사면 절에 갔다.

이십 년도 훨씬 전이다. 어디서 그런 봇장이 났는지 시어머니는 스님께 거금 천만 원을 불사하겠다고 약속을 했단다. 한 번에 다 내겠다는 것이 아니고 평생에 걸쳐 조금씩이라도 내야겠다는 당신과의 약속이었을 것이다. 절에 가면 편안하고 위로받고 기분이 좋아지고 이 모든 것에 대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돈을 내 놓겠다는 뜻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남편과 나를 부르셨고 이런 일이 있었다고 걱정하시는 데 통보같이 들렸다. 나는 무종교인으로 자식들을 위해 특히 삶에 지혜를 밝혀 달라고 양초를 사가지고 다니시는 간절함은 이해가 되었지만 그런 큰돈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는 아들딸이 서울 등 객지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라 돈 들어갈 데가 많았다.

시댁엔 벽장이 있다. 벽장엔 부처님 사진이 모셔져 있다. 그 앞엔 상이 있고 상위엔 향로가 있다. 방은 언제나 향내가 은은하게 배어있다.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물을 받아 상위에 올리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셨다. 아침밥을 하면 큰 밥그릇에 정성을 다해 담아 올렸다. 또 향을 피웠다. 점심도 저녁도 밥을 하면 꼭 올렸다.

일요일 시댁에 갈 때 과일이든 빵이든 시부모님이 좋아하는 것을 사가지고 가면 제일 좋은 것으로 부처님 앞에 올리고 향을 피웠다. 향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먹었다. 생활비를 드려도 부처님께 올렸다. 시어머니는 하루에 몇 번 절을 하는지 모른다.

식사도 완전 채식주의자로 멸치도 드시지 않는다. 된장국을 끊여도 따로 해야 하고, 잡채를 만들어도 당신 것은 따로 만들고, 김치를 담가도 젓국을 넣지 않고 따로 담가야 한다. 당신이 진정한 불자라면 며느리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시댁에선 절처럼 불경소리가 났다. 불경 테이프를 작은 소리로 틀어놓고 1080과로 된 염주를 돌리며 관세음보살을 독송하셨다. 정근기도를 하루에 네 번, 아침 점심 저녁 식사 후와 자기 전에 하셨다. 우리나라 인구 한 사람에 한 번씩 관세음보살을 해 준다고 하루에 4000만 번을 하셨으니 1080과를 한 번 할 때마다 만 번씩 돌린 셈이다. 염불이 일상이 되었다.

결혼해서 그때까지 20년도 넘게 당신의 경이로운 불자생활을 봐 왔기에 불사금을 일시에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절에 가시는 날을 기억했다가 준비해 드렸다. 얼굴을 펴시며 애썼다, 네 복 짓는 거다.” 복을 받는지는 모르고 시어머니 마음이 편안해야 집안이 편안하고, 또 언제 드려도 드려야 하니 매도 먼저 맞는다는 기분으로 드렸다.

겨우 양초나 사가지고 오시던 할머니가 일시금으로, 약속한지 한 달도 안 되어 돈을 가지고 오니 스님도 놀란 것 같다. “어떻게 이리 쉽게....” “우리 큰아들 큰며느리가 주었어요.” 큰 시주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시어머니에겐 전 재산이라 생각했는지 큰아들 큰며느리를 한 번 보고 싶네요.”하시더란다.

시어머니는 절에 가실 때마다 남편도 나도 같이 가자고 했다. 스님이 꼭 한 번만이라도 같이 오라고 했단다. 남편은 물론 나도 가고 싶지 않았다. 당신만 열심히 다니시고 나는 당신이 원하실 때 돈만 잘 챙겨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까지 가면 더 많은 돈을 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 뒤 스님이 아프리카 어려운 나라에 우물파주기 일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이 지나가는데 한 번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금산사에 가지 못했다.

시모는 팔순을 넘어 치매가 시작 되었고 당신의 생애만큼 다녔던 금산사와 연이 끊어졌다. 지금은 구순을 훌쩍 넘겨 요양병원에 계신다. 집에서 가까운 천주교재단의 요양병원이다. 요양병원에 가신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기쁘다 구주 오셨네.”이런 노래를 부르셨다. 관세음보살 대신에. 그토록 열심히 다녔던 절이나 불교 이야기는 한 말씀도 없다.

시어머니 못 뵌 지가 2년 되어간다. 코로나19가 시작된 이래로 면회도 안 되고 비대면 면회 때는 남편 혼자만 할 수 있다. 전부라고 믿었던 큰 아들도 못 알아본다. 아무 움직임도 없이 누워만 계신다.

월주스님이 입적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시어머니가 어지간만 하시면 남편이 운전하고 내가 보듬고라도 같이 가고 싶었다. 직접 조문은 못하더라도 금산사만이라도 갔으면 싶었다. “꼭 한 번 같이 오라.”고 할 때는 안 가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 청을 들어 드리지 못 했을까.

일요일 금산사를 찾았다. 조용히 야외에서 조문을 드렸다. 편찮으신 시어머니를 대신해서 왔다고, 월주스님이 금산사에 계실 때 열심히 기도하고 시간 쪼개 절에 다니시던 그 때가 가장 행복한 시어머니의 전성시대였다고, 어머니를 기쁘고 행복하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평생을 부처 말씀 안에서 사셨으니 스님은 집착 없이 편안하게 가셨을 것 같다.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명복을 빌었다. 오랫동안 죽음에 대해 연구한 E 퀴블러 박사는 난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스님은 어떤 유언을 남겼을까.

금산면에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애도의 만장이 가로수마다 걸려 있고 금산사 경내는 조화가 김제평야의 논만큼이나 많다. 들어갈 땐 못 봤는데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데 다비식을 하기 위해 통나무를 세워 놓은 곳을 만났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다 내려왔다.

 

2021.7.25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월주스님이 입적하신 금산사에 다녀 오셨 군요. 특별한 연을 맺으셨던 시모님께서도 함께 가셨으면 더욱 뜻 깊었을 터인데. 요양병원에 계시니.... 저는 종교가 없기 때문인지 주위에서 절이나 교회에 큰 돈을 시주하거나 헌금하는 경우를 보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답니다. 언제 엿던가? 주위 어떤 사람이 교회를 새로 건축하는데 집을 팔아 헌금하는 경우를 보고 무척 놀랐던 적이 있답니다. 무종교인 입장의 생각이 그렇지만 신자의 입장에서 전혀 다르겠지요. 그 또한 복을 짓는 일이기 때문에...., 참 저는 아직도 금산사에 가본적이 없답니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긴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