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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무지개 색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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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61회 작성일 24-03-04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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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색 그녀

윤복순

 

사람에게는 몇 가지 색이 있을까. 하나를 특별나게 잘하는 사람도 있고 캐면 캘수록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는 팔방미인도 있다. 나는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어 아무런 특색이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채색으로 산다.

그녀는 나보다 스무 살 정도 어려 빨간색만큼 눈에 확 띤다. 목소리도 하이 톤이라 더 튄다. 말도 예쁘게 잘한다. 적재적소에 맞는 말을 어찌 그리도 잘 찾아서 할까. 그녀와 같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 생기든 마음이 놓인다.

행사장에서 플래카드를 어떻게 달까 쩔쩔매는데 자기 가방에서 스카치테이프를 가져와, 의자에 올라 위치를 확인하더니 키가 큰 식당 도우미를 불러 보기 좋게 달았다. 가방에 스카치테이프를 가지고 다닐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가로 세로 길이, 무슨 내용리라는 것 까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테이프 챙겨갈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사회생활의 경험이 없는 것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 졸업 후 1년 남짓 관리약사를 하다 결혼을 했고 조그만 약국을 개업해 지금까지 40년 넘게 혼자서 운영하고 있다. 조직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행사를 주관해 본 적도 없다.

남편은 나를 입여왕이라 부른다. 내가 입만 가지고 산다고 붙인 별명이다. 오늘 어머니 병원비 내는 날, 은행가야 하는데, 며느리 생일이니 전화 해줘, 등등. 남편이 날짜 기억 못하는 것 내가 챙겨주니 고마운 일 아니냐고 큰소리친다.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배우려고도 안 한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탈 때 무료승차권 뽑는 것을 남편이 하면서 당신 혼자 서울 올 수도 있으니까 배우라고 한다. “아니야, 당신 없으면 비서 데리고 다닐 거야.” 언제나 이런 식이다.

퇴근하면서 휴대폰을 약국에 두고 다닌다. 토요일도 마찬가지다. 일요일은 근무를 하지 않으니 전화가 와도 받을 수 없다. 월요일 행사가 있었다. 출근하니 카톡은 100개도 넘게, 전화도 많다. 그녀가 행사장에 나를 데리고 가는데, 행사장소와 시간은 알려주지 않은 채 약국에서 몇 시에 만나자고만 약속이 되었다. 전주니까 만나서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보고 마인드가 안 되었단다. 어찌 장()의식이 없냐고 야단이다. 이럴 땐 늙은 노란색이다. 누가 위인지 모르겠다. 혹 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행사 전날 참석자들에게 전화해서 변동사항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못 오는 사람이 이만저만 사정이 생겨 못 간다고 문자 넣든지 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사를 주관해보지 않아서 여기까지다.

현대사회에서 휴대폰은 분신이니 꼭 가지고 다니라고 한다. 무거워서 또 그리 바쁠 것도 없어 안 들고 다닌다고 하니 왜 상대방 생각은 안하고 자신만 생각하느냐고 야단이다. 연락하는 사람 입장에선 얼른 다 연락하고 마무리해야 하는데 나 한 사람 때문에 일을 다 끝낸 것이 아니니 찜찜하지 않겠느냐고 가닥가닥 반박도 못하게 옳은 말만 한다. 이럴 땐 차디찬 파랑색이다.

차를 타고서야 행사장 장소를 알려주었다. 처음 가는 길이니 미리 알려줘야 검색을 해 둘 수 있다고 적어도 하루 전에는 카톡에 올리라고 한다. 언젠가 남편과 부여 가림성을 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네비게이션에 나오지 않아 가림성카페를 치고 가서 주위에서 물어물어 찾았던 기억이 난다. 또 채계산을 갈 때도 채계산농장을 치고 가서 찾았었다.

아들이나 사위 차를 탈 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 새로운 곳 찾아갈 일도 별로 없어 이런저런 이야기꺼리 만들면서 업데이트 할 생각도 안 하고 다닌다. 그녀는 젊으니까 입력하면 바로 나올 줄 알았다고 하니 나 같은 행동은 매너에 어긋난다고 한다.

후배 차를 탈 때는 어디에서 모임이 있는지 몇 시에 모이는 줄도 모르고 후배가 몇 시 몇 분에 약국 앞으로 나오세요.” 하면 그 시간 보다 5분 쯤 먼저 나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이렇게 편하게 살았다. 아니 무례하게 산 것 같다. 무례한 줄도 모르고. 후배에게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일침을 준다. 도도한 보라색이다.

운전은 베스트드라이버다. 어찌나 잘하는지 계속 나의 고쳐야 할 습관을 말해 주는데도 편안한 승차감에 기분이 좋아진다.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똑똑하게 잘 하는 그녀, 신호등까지 초록불이다. 지루하게 비가 내려 온통 회색인데 그녀의 운전 솜씨 때문에 녹색이다.

그녀가 오늘 행사에서 사회를 봤다. 고급스런 멘트와 재치 넘치는 위트, 식장의 부위기, 그녀는 어느새 상큼한 오렌지의 주황색이다. 적당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 그리고 젊음, 어디서 이런 인재를 구했냐고 야단이다. 내 이름이 복순이라고 내가 복이 좀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행사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 앞에선 자기를 한 없이 낮춰 배경이 되어주는 남색으로 변했다. 이런 상식과 능력은 그녀가 많은 학회에 참여해 봤고 또 주관하였기에 가능할 것이다. 박사로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는 자신감 넘치는 자세가 한없이 부럽다. 그녀는 무지개 색을 다 가졌다.

나는 직장생활을 해 보지 않아 상하관계 동료관계 등 아는 것이 없다. 돌아오는 길, 나의 나쁜 습관들을 보는 족족 말 해 달라고 하니, “ 약사님은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매력이니까 너무 위축되지 말아요.” 이렇게 나를 달래준다. 나는 존재감이 없어 어느 모임에서든 있는 듯 없는 듯 해 몇 년이 지나야 겨우 내 이름을 다른 사람들이 알 정도다.

모나지 않게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편안하게 즐기면서 살자가 나의 철학이다. 오늘 그녀 말을 들으니 개인주의를 넘어 꽤 이기주의로 산 것 같다. 내 스스로 검정색이라 여기며 나름 남들과 불편하지 않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내 멋대로 살았나 보다. 그녀가 무지개 색을 다 합한 게 검정색이란다. 그녀의 검정색과 나의 검정은 왜 이렇게 다를까.

 

2024.2.19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모나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시는 모습 옆에서 듣기만 해도 푸근하고 흐뭇합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