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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경기전(經基殿)에서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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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1건 조회 142회 작성일 23-10-1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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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慶基殿)에서 유감


전주 한옥마을에 자리한 경기전(사적 제339호)과 만남이다. 시월의 둘째 주 토요일 행선지도 제대로 모른 채 따라 나섰던 문학기행 목적지가 전주였다. 일정 중에 한옥마을이 주요한 대상이었다. 오전에 최명희 문학관을 비롯해서 한옥마을을 대강 둘러보고 점심 후에 경기전을 찾았다.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경건한 성지였음을 인지하지 못한 듯한 관광객들의 행태가 낯설고 겸연쩍어 모르는 척 외면한 채 한 발 물러서 구경꾼이 되니 한결 가벼웠다.


경기전은 조선시대의 묘사(廟祠)로서 조선 태조인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건물이다. 전주는 전주 이씨인 조선 왕조의 본관지로 태종이 전주 • 경주 • 평양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어용전(御容殿)이라했다(1410년). 그 후(1412년) 태조 진전(眞殿)이라고 개칭되다가, 세종 때(1442년)에 이르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숭전(永崇殿)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런데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1614년)이 중건했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 부지의 일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하고 학교를 세움으로써 현재 남아있는 모습은 홍살문과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진전(태조어진)으로 이어지는 간결한 구조로 바뀌었단다. 


경기전 앞 광장의 전주 경기전 하마비(全州 慶基殿 下馬碑)는 유형문화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22호)라고 했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1614년)에 세워졌고 철종 때(1856년) 중각(重刻) 되었단다. 이 비에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으로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라고 새겨져 있었다. 조선 왕조의 상징인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성지 앞에서 누구를 막론하고 말을 내려 예를 갖추는 행동은 거역할 수 없었으리라.


경기전을 둘러보기 위해 정문으로 들어서면 홍살문(紅箭門),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 진전(眞殿) 차례의 직선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홍살문은 능(陵) • 원(園) •묘(廟) • 궁전(宮殿) • 충신이나 열녀 또는 효자 등을 배출한 집안이나 마을 따위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으로 홍전문(紅箭門) • 홍문(紅門)이라고도 호칭한다. 정확한 정의는 없지만 홍살문은 ‘신성시 되는 장소를 보호한다거나 예를 갖추고 행동해야 할 장소임을 일깨우는 의미’ 정도라는 전언이다. 따라서 경내에 들어서며 가장 먼저 마주하는 홍살문은 “조선 태조 어진이 봉안된 진전에 앞에 도착했으니 의관을 바로하고 마음을 경건하게 가져 예를 갖추세요”라는 정도의 의미라고 받아들이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 문에서 외삼문 앞까지는 길을 따라 내키는 대로 통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외삼문을 거쳐 내삼문을 지나 진전에 이르는 길을 걸을 때는 정해진 법도를 철저히 지켰다고 한다. 종묘(宗廟) • 문묘(文廟) • 향교(鄕校) • 서원(書院) 등의 출입문을 가리키는 신문(神門) 즉 신삼문(神三門)의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현대인들은 거의 모르고 있지 싶다. 신문은 ‘문을 세 칸으로 나누어 출입구를 셋으로 만든 데서 비롯한 말’로서 외삼문과 내삼문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외삼문은 종묘 • 문묘 • 향교 • 서원 • 경기전에 진입하는 초입의 문을 이르는 말이다. 한편 경내에 들어가서도 다시 신전 혹은 진전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내삼문을 만들어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정결하며 엄숙한 분위기 유지를 겨냥했던 것이다.


외삼문과 내삼문 즉 신문을 구태여 셋으로 나눈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신문을 셋으로 나누어 만듦은 신(神)이 출입하는 길인 신도(神道)와 사람이 드나드는 길인 인도(人道)를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들 세 개의 문중에서 중앙의 문은 신이 출입하는 신도이고, 양쪽은 사람의 길인 인도이다. 그런데 사람이 들어갈 때는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서 왼쪽 문으로 나오도록 정해져 있다는 귀띔이다. 한편 신문은 늘 닫는 게 상례인데 춘추 제향이나 삭망(朔望)* 때는 문을 열고 헌관(獻官)만 출입하고, 사람의 문인 양쪽의 문은 항상 열려 있고 일반 제관이나 참배객이 오가도록 규정했단다. 


현재 경기전에는 외삼문에서 시작되어 내삼문을 지나 진전에 이르기까지 직선으로 뚫려있는 신도의 바닥은 일정한 규격의 돌로 포장되어 있어 양쪽의 맨 흙바닥의 인도와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신의 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 이유인지 무엄하게도 신성 불가침한 신도를 함부로 밟으며 걷거나 넘나들었다. 어쩌면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생뚱맞은 트집이고 쓸데없는 시비라고 따질 듯한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거스를 수 없어 보였다. 이처럼 지엄한 법도가 휴지 조각이 된 현실을 선인들이 본다면 대경실색 할 듯하다.


경기전의 터(址)에 화기(火氣)가 강한가 보다. 진전(태조어진) 앞의 신의 길인 신도의 양쪽에 각각 3개의 커다란 무쇠 솥이 일렬로 안치되어 있고, 거기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는 경기전의 강한 화기를 잡으려는 비보(裨補)*이지 싶었다. 조선 시대 관악산 화기가 강해 한양에 크고 작은 재해나 화마가 끊임없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이의 해결책 일환으로 광화문 앞에 해태 상을 세우거나 남대문 즉 숭례문(崇禮門) 현판을 세로로 써 붙여 강력한 화기를 누르려는 대응과 같은 맥락으로 솥을 안치하고 물을 가득 채운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흔치 않지만 사찰의 대웅전 앞 좌우에 큰 독*을 안치하고 물을 채운 경우도 절터에 강한 화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비보이다. 또한 묘지에서 좌청룡 우백호 중에 모자라는 부분을 흙을 쌓아 올리거나 나무를 심는 방법도 이에 해당한다. 


유감스럽게도 태조 전전의 보수공사로 어진을 제대로 친견할 수 없었다. 홍살문 • 외삼문 • 내삼문 • 진전(태조어진)을 살피고 나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全州史庫)나 예종의 태실(胎室) 및 비(碑)를 비롯해 신묘한 와룡매(臥龍梅) 등을 둘러보면서 오가는 관광객들을 눈여겨 살펴봤다. 특히 외삼문을 거쳐 내삼문을 지나 진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신의 길인 신도와 사람의 길인 인도와 관련되는 동문과 서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조신하게 따르려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역사를 배울 때 왕의 이름이나 중요 사건은 달달 외웠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시설이나 성스러운 곳 출입에 관련된 엄한 법도에 대해서는 들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는 생각은 내 기억 체계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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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망(朔望) :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

* 비보(裨補) : 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움. 

* 독 : 간장, 술, 김치 따위를 담가 두는 데에 쓰는 큰 오지그릇이나 질그릇. 운두가 높고 중배가 조금 부르며 전이 달려있다. 


2023년 10월 16일 월요일

댓글목록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아파트 노인회 회장 자격으로 - 김포시 주관 문화 탐방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방에 있는 명소를 몇 군데 둘러 보면서 - 사전 지식이 없었던 저에게
문화재 관광해설사 설명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