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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암장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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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211회 작성일 23-10-0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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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장터에서

윤복순

 

윤의사는 소년 때 일본 식민지 교육에 압증을 느껴 자진 퇴학 후 서당 서숙에서 공부를 하고 귀농운동에 정열을 태웠다.

그 뒤 광복을 위해 중국에 망명, 19324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왕 생일과 상해 점령 전승기념 축하행사가 열렸을 때 폭탄을 투척했다. 일본군 대장과 일본 거류민 단장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고위층들도 많은 부상을 당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망했다.

윤의사는 자결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일본군에 체포된다. 즉시 공개 처형될 예정이었지만 그의 순국이 알려지면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일본은 교도소에 구금한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이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극찬했고 이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해외만방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불꽃을 다시 지피는 활력이 되었다.

가혹한 고문 끝에 5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우편수송선을 타고 오사카 위수형무소로 후송되고 약 한 달간 그곳에 수감된 후 19321219740분 가나자와 9사단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에서 총살당했다. 그때 나이 25세였다.

유해는 일제에 의해 비밀 암장됐고 묘비도 봉분도 없었다. 노다야마 공동묘지 관리소 가는 길이라서 13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녔다. 재일동포 200여명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묘지를 발견했다. 독립과 더불어 194636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그때 유골 208개중 7개를 찾지 못했다. 손뼈 등으로 고문으로 상했을 수도 있으나 소나무 뿌리 속에서 없어졌을 수도 있어 암장터는 유골이 남아 있으니 또 다른 윤의사의 묘이다.

순국기념비는 상해 의거 60주년을 맞아 세워졌다. 그 당시 일본인들의 반대가 심해 순조롭지 않았으나 가나자와 시장의 묵인이 있어 가능했다고 한다. 그 터는 영구 임대한 상태다.

여기까지 알고 일본에 갔다. 추모행사는 순국기념비 앞에서 할 예정이었다. 이번 행사를 위해 가야금 산조를 하는, 아쟁 연주를 하는 선생을 모시고 갔다. 먼저 암장터로 갔다. 회장님을 선두로 한 사람씩 헌화를 하고 각자의 종교의식으로 애도를 드렸다. 마지막은 가야금 선생이었다. 그녀는 양반다리를 하고 땅바닥에 덥석 앉아 큰절을 한다. 나는 서서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는데 좀 가벼운 것 같아 염치가 없다.

그녀가 이곳이 유골이 있는 곳이니 영혼을 달래는 흥타령을 암장터에서 하겠단다. 흥타령이 흥이 나는 신나는 타령인 줄 알았는데 흥얼흥얼하는 타령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떠는 목, 평으로 내는 목, 꺾는 목의 시김새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흔히 흥타령을 알아야 남도가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고 대고 허~~성화가 났네.” 슬픈 설움조로 되어 있다. 아쟁연주에 맞춰했다.

아쟁이 이토록 청승맞게 슬픈 소리를 내는 줄 몰랐다. 가야금 거문고 아쟁을 잘 분간도 못했으니 그 소리를 언제 깊이 있게 들어본 적이 있던가. 최저음의 칼칼한 음색이다. 가슴에서 뭔가 불덩어리 같은 것이 올라오게 하더니 아이고 대고 창을 하니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창을 하는 선생은 큰 키와 큰 몸에서 고래와 같은 소리가 나온다. 하늘을 찢을 것 같은가 하면 마음을 에이는 소리로 추모 공연 내내 우리 회원들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눈물을 훔치게 했다.

윤봉길의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우리 모두는 진심이었다. 돌아보니 나는 먼지 한 티끌만도 못해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아쟁도 흥타령도 어떤 명문의 글보다 연설보다 윤의사를 추모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애국심을 가득 안고 순국기념비 쪽으로 갔다. 순국기념비 앞에서 헌 청수, 헌향, 헌초, 헌화, 묵념, 추모사로 이어지는 정식 행사를 했다. 추모공연으로 아쟁연주와 판소리가 있었다.

이곳을 관리하시고 민간 교류단 단장이신 박현태 선생님께서 우리의 행사를 아시고 찾아 오셔서 더욱 더 의미 있었다. 순국기념비 터는 영구 임대돼서 괜찮은데 암장터는 비워달라고 해 법정 투쟁을 하고 있는 중이란다.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도울 일은 없을까. 아무쪼록 암장터가 그 지리에 역사의 현장으로 영구히 있을 수 있길 기원한다.

일본 회원들이 나도 모르는 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와 암장터를 알려주고 추모행사를 할 수 있게 준비해주는 것은 물론 윤의사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가나다라클럽 회원들이 한 달에 두어 번씩 청소를 하는 자원봉사를 한다고 해 많이 고마웠다.

오래 전 상해 임시정부와 홍구공원에서 윤의사에 대한 설명은 들었지만 어느새 다 잊고 지냈다. 그곳 방명록에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적었다. 매년 광복절을 맞으면서도 특별히 윤의사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내 마음의 본바탕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일본 방문은 문화교류 외에 윤봉길의사 추모행사라는 큰 의미가 있다. 수많은 해외여행을 다녔지만 이번만큼 마음이 뿌듯한 적은 없다.

 

2023.9.20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잊고 지내던 윤봉길 의사에 대한 우국충정의 높은 뜻을 되새겨 보는 계기를 만들어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윤의사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면서 나는 무엇을 하며 생을 살았던가하는 성찰을 하기도 했지만, 위대한 분들에 대해 감히 견준다는게 외람되다는 자괴감만 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