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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포도 링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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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265회 작성일 23-09-2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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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링거

윤복순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주시어/ 그 열매들이 익도록 서둘러 재촉해 주시며/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다. 우리 포도도 기도 덕분에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최고의 상품으로 매일 출하되고 있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주머니들이 내리는데 오늘 고생 많았다고 어서 가서 쉬시라고 웃는 얼굴로 말을 해야 하는데 고개만 끄덕 하고 말았다. 너무 지친 얼굴을 보이면 안 돼 손수건을 대각선으로 접어 얼굴을 가려 모자위로 묶었다.

일요일 포도 출하가 400박스 정도 나왔다. 송이가 제각각이니 무게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예쁜 쪽이 전면으로 나오게 담아야 하니 나는 포장작업을 하지 못한다. 아무리 바빠도 도와줄 수가 없다. 대신 박스만 접는다.

많이 나가는 날은 1000박스 출하된다. 미리미리 접어놓는 것이 일손을 돕는 것이다. 포도농사 중 풀 뽑기와 상자 접기가 가장 스트레스 덜 받는 일이다. 대부분은 잘 접어지지만 개중엔 쉽게 들어가지 않아 손으로 탕탕 쳐야 할 때도 있다. 집에 와서 보면 손에 손목에 멍이 들어있기도 한다.

상자를 접어 좌우 앞뒤로 쌓아놓다 보면 상자 성()에 갇히게 된다. 사방이 막혀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아 땀범벅이다. 작업실 장소가 좁아 접은 상자를 천장까지 쌓는데 나는 그런 기술도 없어 손이 닿는 곳까지 쌓아 놓는다.

무엇을 하든 한 번 하기로 한 것은 진심을 다해 하는 편이다. 아주머니들은 새참을 먹고 잠깐 쉬는데 나는 쉴 필요가 없을 때면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사모님 좀 쉬세요.”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그들은 매일 일을 하니 힘의 안배를 나눌 줄 안다. 나는 일요일 하루 하니 아침에는 신나서 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물도 먹지 않는다. 멀리 보면 쉴 때 쉬고 새참이랑 물이랑 먹는 것이 더 능률적일 것이다.

점심때까지 안 쉬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나면 식곤증에 피로가 밀려 눈이 떠지질 않는다. 박스 접어놓은 옆에 누워 잠을 잔다. 박스먼지 상자조각 박스 묶은 끈 등 구질구질해서 천간쟁이들은 돈 주면서 자라고 해도 못 잘 그런 환경인데 나는 골아떨어진다.

일어나보니 아주머니들은 열심히 포장작업중이라 미안하다. 그들도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나만 주인이라고 자고 있었으니. 보기 싫고 밉고 불편했을 것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죽을 둥 살 둥 박스를 접었다. 아침에 목표했던 1500개를 접기 위해 물도 마시지 않고 손을 잽싸게 놀렸다. 똑같은 반복 동작에 자세가 불편해 다리를 이리저리 바꿔보지만 허리도 어깨도 좀 쉬어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포도가 익어 상품이 될 때까지 아주머니들의 손이 몇 번 갔을까. 5월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손을 거쳤기에 그들도 애정이 남다르다. 작년보다 잘 되었다는 둥 누가 이렇게 알 솎기를 잘 못해서 포장하기 힘들게 하냐는 둥 이건 누구 작품이라며 그들끼리 이름을 부르며 농담을 하기도 한다. 졸리고 힘드니까 잠을 쫒고 웃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들이 매년 농사를 지어주니 가족 같다. 그들은 우리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올해도 출하가 결정된 날 다른 일이 있어 못 온다는 것을 출하 못하면 포도 값 전부 배상해야 한다.”고 협박(?)해 고맙게도 전부 와 줬다.

간신히 시간 맞춰 출하 물량을 끝내고 개인적으로 주문받은 포장을 한다. 전등 밑에서 일을 하는데 전구가 내뿜는 열이 만만치 않다. 그들이 상자 성 안에 있는 나보다 더 더운 것 같다. 얼굴에 땀방울이 주렁주렁 이다. 나이가 있어 밝은 불 밑이 아니면 썩은 알이나 열과를 골라내기 쉽지 않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그들은 지친 기색도 없이 차안에서 얘기들을 나누고 웃고 동네 사람들 소식도 알려준다. 나는 말할 기운도 없고 눈도 떠지지 않아 눈을 감고 있다. 그들을 집 앞에 내려주고 온다.

남편이 방 화장실에서 씻는다고 나보고 욕실을 이용하란다. 링거부터 먹겠다고 했다. 손만 씻고 포도 한 송이를 씻어 사나흘 굶은 사람처럼 입에 넣고 또 넣고 또 넣고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마구 먹었다. 눈이 확 떠졌다. 링거를 맞은 것처럼 기운이 나 샤워를 할 수 있었다.

포도는 세계적으로 제일 오래된 과일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늦더위로 입맛을 잃었을 때 몇 알만 먹어도 새콤달콤한 맛으로 금방 입맛이 돌아온다.

포도는 포도당이 주이니 위에서 분해될 필요도 없이 소장에서 바로 흡수돼 링거를 맞는 거나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식이섬유의 일종인 펙틴이 들어있어 장 활동도 촉진시켜 변비예방에 좋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춰준다.

()이 치아 때문에 고생을 한다. 임플란트가 한두 달 만에 뚝딱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뜩이나 더위에 지치는데 뭘 먹을 수도 없으니 체중이 많이 줄었다. 전화로 약국에 나가고 싶은데 다리가 휘청휘청 어질어질 하다고 한다. “, 포도 링거 가지고 갈게.” 며칠 후 입맛도 잡고 기운도 잡았다, 한 쪽은 가치를 하고 하나는 본을 뜨고 왔다며 목소리가 힘 있다.

폭염으로, 일상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우리 포도가 링거 같은 역할을 해 주리라 믿으며 다음 일요일도 아니 출하가 끝날 때까지 포도밭에 갈 것이다.

인디언들은 9월을 풀이 마르는 달, 옥수수를 거두는 달, 어린 밤을 따는 달, 도토리의 달, 쌀밥을 먹는 달, 아주 기분 좋은 달,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달 등으로 부른다. 나는 우리 거봉 포도가 링거가 되는 달이라 부르고 싶다.

2023.9.6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봄부터 피땀흘려 지으신 포도 농사의 결실 일정한 시기에 맞춰 수확해야하기 때문에 수고가 믾으시겠습니다. 이제는 출하를 거의 마치셨겠습니다. 모든 농사가 쏟은 정성에 비해 얻는 소득은 시원치 않은 형편이니 모든 농산물을 재배해 출하시는 분들게 늘 고맙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즐거운 한가위 맞으시기를 기원드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