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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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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드림출판사 댓글 0건 조회 655회 작성일 19-11-2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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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Gadadhar Chatterji, Gadadhar Chattopadhyaya라고도 함.
1836. 2. 18 인도 벵골 후글리~1886. 8. 16 캘커타(지금의 콜카타).
힌두인의 종교지도자.
 

라마크리슈나 /라마크리슈나(1881)
 

종교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증명한 사람으로는 현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가난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나 정식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평생 벵골어의 거친 방언으로 말했으며 영어도 산스크리트도 몰랐다. 23세 때 5세 된 사라다 데비와 결혼했는데 금욕주의 신조 때문에 끝내 신방에 들지 않았다. 사라다 데비는 나중에 신격화되었으며 라마크리슈나파()는 지금도 그녀를 성인으로 간주하여 '거룩한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라마크리슈나는 유명한 산스크리트 학자인 맏형 람쿠마르에게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는 '밥벌이나 하기 위한 교육'은 원치 않았다. 신에 관해서 책으로 배우기보다 자기가 살고 예배하는 방식을 통해 신을 '실감'할 수 있기를 원했다. 라마크리슈나는 체질적으로 절제가 어려워 환희와 깊은 침울 사이를 오르내렸다. 7세 때부터 신에 심취했고 신비로운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다. 존경의 대상으로서 수많은 전설에 둘러싸여 있었던 관계로 라마크리슈나의 참모습을 밝혀내기란 상당히 어렵지만 그의 철학적 본질만은 아주 명확하다.
 

라마크리슈나는 정욕과 돈의 유혹에 맞서 싸웠다. 그는 사람이 영적(靈的)인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것은 이 2가지 악() 때문이라고 믿었다. ()에 대한 그의 반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정도였다고 하며 마침내 어떤 종류의 금속도 만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인위적인 사회계급을 거부했으므로 카스트 제도도 자연 배척되었다. 창조와 파괴의 여신 칼리를 신의 최고 현현(顯現)으로 보았던 그는 캘커타(지금의 콜카타) 칼리 사원의 승려가 되자 칼리를 '거룩한 어머니'로 부르며 예배했다. 칼리에게 계시를 달라고 탄원하는 동안 몇 시간이고 계속 울었고 전신이 타는 듯한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그의 상태를 어떤 사람들은 신들림이나 광기나 신경장애의 탓으로 돌렸지만 구마(驅魔)도 의학적 치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결국에는 칼리나 다른 신들의 환영이 나타나 희열과 평온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는 언젠가 칼리를 '찬란히 빛나는 영원무궁한 영혼의 바다'로 묘사한 적이 있다.
 

친척들은 1859년의 결혼으로 그가 안정을 이루기를 바랐으나 사원으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신들림이 나타났다. 그는 12년간의 고행을 시작했고 사마디(samādhi : 자기 유도에 의한 영적 황홀경)의 온갖 상태를 맛보았다. 라마크리슈나는 브라만 계급의 한 방랑여인의 도움으로 요가와 탄트라의 의식을 익혔다. 그는 '슈리 크리슈나'의 환영에서 절정을 이루게 되는 비슈누파()의 의식에도 통달했다. 수도사인 토타푸리를 만나면서 진정한 산니아신(sannyāsin : 고행자)으로 입문했고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을 배웠다. 라마크리슈나는 이내 사람이 영원한 브라만과 일체가 되는 '니르비칼파 사마디'에 도달했으며 이때 '라마크리슈나'라는 이름을 얻었다.
 

1866년 이슬람의 길을 따르면서 마호메트의 환영을 접했다고 전하며 그 후 그리스도교를 연구했을 때는 분명 예수도 보았다. 라마크리슈나는 이 연구와 환영들로부터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같으며 모두가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계시는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에 있는 그의 집 부근에는 수많은 군중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운집했다. 그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평범한 사람으로 머물렀다. 글을 쓴 적은 없지만 사후 여러 권의 어록이 제자들에 의해 출간되었다.
 

라마크리슈나는 모든 것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신을 보았다. 모든 길은 같은 목표로 향한다고 그는 믿었다. 라마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웅덩이에는 온갖 가트(ghat : 물길)가 있다. 힌두교도는 그 액체를 떠와서 ''이라고 부른다. 이슬람교도는 그 액체를 떠와서는 '파니'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교도는 그 액체를 '워터'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같은 물질이며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그의 이름으로 된 교단이 캘커타(지금의 콜카타)를 본부로 전세계에 전도사를 파견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제자인 비베카난다는 1893년 힌두교 대표로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에 참석했다(색인 : 비베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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